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왜구의 정체와 구성원 === [[왜구]]의 정체와 구성원은 한중일을 막론하고 논쟁하는 요소인데, 고려 말 왜구에 대해서는 '''[[남조#s-1.4]]의 생존 전략설'''[* 이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로는 이영 교수가 있으며 그는 일본 학계가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아 남조의 과오를 축소하려고 다민족 해양 세력설을 주장한다 여기고 있다. 좀 더 정확힌 1364년 이작도 전투까지의 왜구는 북조에 더 가까운 [[쇼니씨]], 아기발도와 같은 그 이후의 왜구는 남조의 키쿠치씨와 연관이 있고 당시 일본의 정세에 따라 왜구의 출몰 정도도 달라졌다고 주장한다.]과 '''동아시아 혼란기의 해양 세력 연대설'''이 존재한다. 이성계가 퇴치한 [[아기발도]]의 경우에는 왜구들에게 존중받는 일종의 귀족이라는 기록이 있고, 소수설이지만 몽골인 - 고려인의 혼혈이라는 설도 있다.[* 아기발도라는 단어가 일본어가 아닌 몽골어 바투르에서 기원했다는 점을 들며 일본 학계에서 주장했던 학설이지만 아기발도라는 단어가 실제 본명이 아닌 고려군이 붙인 별명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영 교수는 당시 고려에 공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강력한 해양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만약 존재했다면 고려 조정이 무력하게 당하지 않고 이들을 조직해 왜구를 격퇴했을 것임을 들어 이러한 주장을 비판한다.] 비슷한 시기에 원나라, 홍건적의 잔당들이 세력의 생존을 목적으로 고려를 침략했던 전례를 보면, 동아시아 혼란기의 막바지에 '''최후의 생존을 노리던 세력들의 활동의 일부'''라고 정리하기도 한다. 아직은 연구가 부족해서 결론을 내리기 어렵지만, 당시 약탈 부대의 규모가 [[북조]]를 상대하느라 바빴던 큐슈로만 한정하기 힘든 대규모였으며, 상당한 교육을 받았거나 유목 민족이나 고려인들과의 연관성에 대한 가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왜구 이외의 세력에 대한 이야기는 가설에 그친다. 일반적으로는 큐슈가 포위 직전에 몰린 상태에서 활로를 뚫고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한 [[남조#s-1.4]] 세력의 활동이라고 추정된다. 그 외에는 직접적인 군세를 동원할만한 세력에 대한 증거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결론을 한정하면 [[남조#s-1.4]] 세력이 자신들의 수도가 공략당하는 상황에서 수천명의 귀한 기병이나 지휘관들, 그리고 500여척의 함대를 고려에다가 꼴아박아서 전멸시켰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남조#s-1.4]] 세력으로 특정하기 어렵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참고로 이런 유형의 도박은 후대의 일본 제국조차 저지르지 않았던 일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주만 공습만 해도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고생은 하고 있었지만 중국군을 상대로 일본군은 완승을 거두고 대륙의 중요도시들을 전부 지배하고 있었다. 본토와 수도에서 적군은 한차 떨어져 있었던 상황에서 미국을 기습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고려 말기 침입한 왜구들의 정체를 남조라고 특정할 경우, 남조는 일본 제국을 능가하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이런 가설에는 [[진포대첩]]에 이어진 [[황산대첩]]과 같이 왜구의 세력에 돌이킬수 없는 치명타를 먹인 고려의 극적인 승리를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이며 실제론 일본 본토에서 수세에 몰린 남조 세력이 한반도로 근거지를 옮기려 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실제로 [[남북조 시대]] 일본의 무사들은 근거지를 잃고도 훨씬 먼곳으로 달아나서 세력을 회복한 뒤에 다시 쳐들어오는 경우가 잦았다. [[교토]]에서 쫓겨난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부하들을 이끌고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규슈]]에서 재무장한 뒤 수도인 [[교토]]를 탈환했으며, [[혼슈]] 북쪽 끝인 무쓰 지방에 있던 남조의 장수인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세력이 남하하여 오사카 일대인 이즈미노구니사카이에서 전투를 벌인 것, 남조의 수군 세력으로 기내 지방에 근거지를 두었던 구마노 수군의 활동 범위는 규슈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심지어 일본 사서인 건내기를 보면 슈고 [[다이묘]]인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1441년 가키쓰의 난으로 토벌당하자 미쓰스케의 동생인 [[아카마쓰 사마노스케 노리시게]]는 [[하리마]] 지방에서 사라진 뒤에 행방이 묘연했었는데 알고 보니 고려(조선)으로 건너가 1개국(한 지방)을 빼앗아 나라가 곤란에 처했다고 고려(조선)의 사신이 알려왔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이렇듯 고려 말 왜구들은 얼마든지 넓은 범위에 걸쳐 이동과 원정을 손쉽게 할 수 있었던 기동력이 뛰어난 집단이었다.[* 출처: 잊혀진 전쟁 왜구/ 이영 지음/ 에피스테메/ 50~51쪽] 또한, 위험한 도박이라 보기엔 당시 남조 무사들 입장에선 고려 조운선을 약탈해 병량을 조달하는 것이 상당히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도 반론으로 들 수 있다. 당시 고려는 세곡 운반 체계를 수상교통에 의지하고 있었고 수군을 비롯한 해상 방위 세력도 미흡했다.[* 고려 말기 수군은 그 취약함을 노린 왜구 침공에 대응하며 화포 개발을 비롯한 힘을 점점 키워나갔고 이는 조선 수군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 지리에 익숙한 대마도 등의 지원이 있다면 고려 침입은 많은 군량미를 일본 내에서 구하는 것에 비해 적은 노력으로 약탈해 올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그리고 남조 배후설에선 요시노야마의 남조 조정 자체보단 남조 정서부 편을 들은 키쿠치 씨 등의 규슈 주요 호족들을 왜구의 정체로 추정한다는 점에서도 도박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일본 남북조 내전은 단일한 두 세력의 전쟁이 아니라 한국의 후삼국시대처럼 휘하 지역 무사들의 이합집산과 독자 행동이 존재했다. 아울러 고려 말 왜구의 정체를 두고 동아시아 해양세력이라거나 혹은 고려인이 더 많았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데, 1376년 10월에 일본에서 귀국한 고려의 사신 나흥유가 전달한 일본 승려 도쿠소 슈사(得宗周佐)의 편지를 보면, 왜구의 발생 배경 및 그 실체에 관해 "서해도 일로의 규슈 지역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이 할거하여 공부(세금)을 바치지 않은 지 이미 20여 년이 지났다. 서변 해도([[쓰시마]]와 이키섬 등)의 완고한 백성들이 이 틈을 타고 고려를 침구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들(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를 가리킴)의 소행이 아니다. 조정(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이 장수를 [[규슈]]에 파견해 들어가서 매일 싸우고 있으니, 바라건대 규슈만 평정된다면 [[해적]](왜구)은 금지시킬 수 있을 것임을 하늘과 태양에 두고 맹세한다."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조정이 장수를 규슈에 파견해 들어가서 매일 싸우고 있으니'라는 구절은 당시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을 파견해 규슈에서 남조와 격전을 치르고 있었던 점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만일 고려 말 왜구의 정체가 동아시아 해양세력이라거나 혹은 고려인이 더 많았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일본측 인사가 전적으로 왜구 발생의 원인을 자국 내의 반란 세력들 탓이라고 인정했을까? 오히려 고려 사신한테 "왜구는 여러 잡다한 세력들이 섞여 우리가 금지시킬 수 없다. 그리고 왜구 중에는 당신네 고려 백성들도 많으니, 고려 백성들 단속부터 제대로 하라."고 대답했어야 아귀가 맞는다.[* 출처: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 이영 지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